32장 15-35절
출애굽기 32장 15-35절
15-16.『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돌이켜(이펜 יִּ֜פֶן)에서 이펜은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동사 파나의 기본 뜻은 '향하다','대면하다'인데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던 모세가(백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하나님의 보장을 받고 다시 백성과 대면하게된
것을 의미한다.
두 증거판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가리킨다. 판의 양면은 판의 앞뒤로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고, 판의 한 면에 글이 새겨져 있던 당시의 비석들과는 다름을 보여 준다. 한 면은 하나님과 또 한 면은 백성 간의 언약의 돌판이라는 의미다. 백성들이
언약을 글자로 보면, 겉으로는 율법으로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복음으로 바라보이고, 그리스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 1절에서『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하나님이 만드신 것(마아셰 엘로힘)에 대해서, 마아셰 는 아샤 (만들다)의
명사형인데 활동, 노동 이라는 뜻이 있으며 특히 공들인 작품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산중턱까지 올라갔던 일행 중(24:1) 모세가 산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수행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산 밑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모세가 돌아오기 까지 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진 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산 정상에서
이미 이스라엘 진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싸우는 소리(콜 밀레하마 קֹ֥ול מִלְחָמָ֖ה )”는 전쟁(밀레하마 מִלְחָמָ֖ה)의 소리(콜ֹ֥ול)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돌아올 때까지 진에 내려가지 않고 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전쟁이 난 줄로 생각했다. 즉 다른 부족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승리하여 외치는 소리와 패배하여 외치는 소리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전멸되자 승전가를 불렀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반면 출애굽 전야에
있었던 애굽 사람의 곡소리는 애굽이 패하여 부르짖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산 밑에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떠들썩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에 여호수아는 혹시 지도자가 없는
사이 이민족이 침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의 상황을 전해들은
모세는 그 소리가 우상을 숭배하는 가무소리인줄 금방 알았다.
19.『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춤추는 것(메홀로트ּמְחֹלֹ֑ת )은 메홀라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 종류의 춤 혹은 춤 동작의 여러 형태를 가리킨다. 우상
앞에서 춤추는 것은 이방 종교의 전형적인 제의형태를 황홀 상태에까지 이르러 급기야는 도덕적 가치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까지 하는데, 여기에서 성적 쾌락이 일어나게 된다.
“크게 노하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 아프”(חַר־אַ֣ף )를 직역하면 분노가
불타 올라'란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에도
쓰인 말이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백성들의 편에 서서 용서를 빌었으나, 막상 백성들의 범죄 현장 보고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처럼 화를 낸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백성들의 죄가 심했음을 보여 준다.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언약의 법을 받아 내려왔으나 정작 이를
실천해야 할 백성들은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증거 판을 깨뜨림으로써 언약의 효력이 상실되고 파기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그것은 또한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 법을 따르지 않게 된 시점에서는 더 이상 법이 소용 없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세가 깨뜨린 것은 법이 새겨진 돌판이며, 그 법 자체를 깨뜨린 것은 아니다. 이는 뒤이어 모세가 다시 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갔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지 않고, 모세가 만들어야 했다.
20.『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금덩어리 자체는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나
기타 물질로 만든 상에 금을 입힌 것이라면, 부수어 가루를 냈을 경우 충분히 불탈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금송아지는 겉만 도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파괴 행위는 우상에
대한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때에도 이와 같이 우상과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든 일이 있다(왕하23:15).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금가루를 탄 물이 백성들에게 저주가 되게하는 쓴 물이 됨을 의미한다. 율법 하에서 외간 남자와의 부정으로 의심받은 여인은 일련의 조사를 받고 '저주의 물'을 마셔야 했는데(민5:12-24). 이스라엘 역시 지금 그의 남편이 되신 하나님께 대해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물은 바로 저주의
물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선 반드시
스스로 죄값을 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21.『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어떻게”로 번역된 부분은 “무엇을” 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아마 아론은
백성들로부터 위협은 받았을테지만 실제적인 해악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모세는 죄의 책임을 백성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자에게 묻고 있다. 지도자의 행위가 전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 및 책임이 실로 막증함을 알 수 있다.
큰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아 가돌'는
우상숭배의 큰 죄를 의미하고,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대한 죄악인지를 시사해 주는 말이다. 우상숭배는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0장 9절에서『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하타아
가돌 חֲטָאָ֥ה גְדֹלָ)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22.『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내 주여(아도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사용했던 호칭이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후대에 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를 직집 부르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여 야훼 대신 아도나이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아론이 모세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모세가 그의 형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같은 권위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이미 허락하신 것이다(4:16) 만일 전체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모세가 육신의 형에게 매이게 된다면 백성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서 가장 대하기 힘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형으로부터도 권위를 인정받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하신 것 같다. 이로 볼 때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오며 또한 그러한 권위만이 참된 권위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백성의 악함” 문자적으로는 '악(죄) 중에 있는 백성'이란
뜻이다. 아론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백성들 편으로 은근히 떠넘기고 있다.
23-24.『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모세의 물음에 대해 아론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모세의 물음은 '백성들이 아론에개 무엇을 했는가'인데 아론은 백성들이 악했고 자신은
단지 금만 수집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론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자신이 그 제사장 역할을 했다. 즉
아론은 소극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묵인 방조했고 적극적으로는 동조, 협력, 나아가서 그 지도자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빼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크(פָּרָ֖קוּ)는 '뜯어내다, 부스러뜨리다, 조각내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백성들은 단순히 금붙이롤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부숴뜨린 상태로 가져온 것이다. 우상 숭배를
위해 백성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귀금속을 파괴할 정도로 열의를 갖고 있었던 셈이 된다.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론의 대답 중 결정적으로 잘못된 부분이다. 송아지는
불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붓고, 새겨서 만든 것이다. 죄를
전가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송아지는 죄의 전가를 통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는다.
25.『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방자하니(파라 פָרֻ֖עַ)” 풀어놓다, 석방하다 라는 의미를 갖으며, 이와 함께 벌거벗기다 라는 뜻도 있다. 이방 종교의 제사 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광란의 축제를 지냈고, 이는 자연적으로 성적 타락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성적 타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이방신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한 것은 자신들의
영적 수치를 드러낸 것이다.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원수란 애굽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모습은 애굽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껏 자신들의 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그렇게 출애굽을 강행하더니, 결국 광야에서 자신들이 섬기는 송아지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금 행여 여호와의 영광이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당할까바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거기에 분노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6.『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진 문’은 시내 산 앞에서 야영하고 있던 백성들의 진영입구를 가리킨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여호와를 위하는 자는 누
구냐 혹은 누가 여호와를 위하는가 라는 말이다. 즉 모세는 일방적으
로 여호와를 위하는 자는 나오라 고 하지 않고, 누가 그런 사람인가를 물어서 확인한 다음
자신에게 나오라고 하였다. 이는 곧 백성들에게 선택과 결단을 함께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따라서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자는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 및 비록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즉시로 그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레위 자손” 레위인들 중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던 모든 자들일 것이다. 곧이어 이들은 모세의 명을 따라 그들의 이웃과 형제까지 칼로 쳐죽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일로 간주되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다(신33:9).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백성들 앞에 섰다. 따라서
모세 편에 서는 것은 곧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었다.
27.『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어구이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을 전달했는데,
모세가 이 같은 공식 어투로 말을 시작하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이스라엘 진은 외부와 차단된 형태였다. 특히
문이라고 번역된 '솨아르'는 '대문', '성문'을 뜻하는데
그 진은 여러 텐트로 이루어진 일종의 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광야 행진 중 당할지도 모를 이민족의 습격에 대비키 위함이었을 것이다.
형제는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같은 이스라엘인을 가리킨다. 레위인들이 실제로 형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들끼리 먼저 치고 받았을 것이나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이처럼 성경에서 형제라고
할 때는 대개 친구나 이웃, 동족을 가리킨다. 신약에서 형제는
영적인 공동체 속에서의 형제를 의미한다.
“도륙하라” 기본 동사 '하라그'는 일반적 의미의 살해보다는 한층 가혹한 '살육하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모세의 명령은 사정없이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나 그 기준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도륙"하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세가 하산해서 금송아지를 불사르고 일련의 문책 조치를 단행할 때, 그때까지도
반성의 기미가 없이 계속 죄를 짓고 있던 사람들이 도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28.『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이들 죽임당한 삼천 명은 우상 숭배의 주모자급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사태의 현장에 있었던 레위인들은 전체 백성을 우상 숭배로 끌어들인 적극적인
주모자들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범죄자들을 잔인하리만큼 철저히 응징하는 본 장면을 통해
우상 숭배의 죄악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고 또 그 결과가 무서운지를 알 수 있다.
삼천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이다. 영적 전쟁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 삼은 옛성전이 무너지고 새성전이 세워지는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의
편에 있지 않은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등장이 삼이라는 숫자인 것이다. 이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명 가량이 회심을 했다. 베드로는 새로운 성전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는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29-31.『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헌신하게 되었느니라(말레 מִלְא֨וּ)” 너희 손을 채우라 는 뜻이다. 한글 개역과는
달리 명령형의 말인데, 여기서 '손을 채운다'는 말은 곧 제사장적 역할을 뜻한다. 즉 레위인들이 범죄한 자들을
죽인 것은 그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레위인들은 제사장으로
위임받은(손을 채운)셈이 된다.
“복을 내리시라” 이 복은 곧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축복을
의미한다. “올라가노니”일차적으로는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올라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에서 '번제'를 뜻하는 '올라'가 생겨났으므로, 이
말에는 일종의 제사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모세가 산에 올라간 것은 백성들을
위한 대속 제사를 드리러 간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모세는 이미 범죄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한 결과 전 백성들을 다 진멸하려던 그분의 뜻을 돌이켜 놓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징벌의 경감에 불과 했지 완전한 사면에 대한 약속을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세는 이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사죄를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그러나로 번역된 것은 임티사이다. “만약(임) 용서하십시요(티사)”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원하시면 용서하십시오' 혹은 '가능하면 용서하십시오'로 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첫째,하나님께서는 능히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권능자이시다 둘째, 그러나
죄를 사해 주고 안 사해 주고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회개는 곧 옛사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주의 기록하신 책”이라는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준다.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자만이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
생명책은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죽어있는 영을 살리기 위함인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33-3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흙에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 17장 13절에서『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범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없으므로, 영적 생명이 없으며, 흙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다시 지워버리고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했는데, 백성들이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간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범죄한 백성들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인데,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하나님께 간구를 하는 내용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네게 말한 곳”은 호렙산에서 모세를 소명할 때 계시하셨던
젖
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따라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으로 인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그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계시며 그들의 죄를 사하시어 모세로 하여금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보응하다(파카드)는 말이 방문하다 계수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찾는 날에는 그들의 죄를 찾으리라'가
된다. 한편 '파카드'는
이외에도 '계수하다, 복수하다, 보살피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양과 염소로 나누는데, 양은 보살핌으로, 염소는
보응하는 것으로 계수되는 것이다. 이 용례대로 번역하면 '내가(그들의 죄를) 계산하는 날에는 그 죄를 갚으리라'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징벌하지
않겠으나, 다시 죄를 지으면 훗날 이번의 죄까지 함께 징벌하시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출애굽 제1세대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된 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민14:29-33).
35.『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25절은
28절에 언급된 삼천 명 살륙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이자 32장의 결론이다.“치시니” 치다(나가프)의 나가프'는 때리다, 살해하다는
뜻 외에 '역병에 걸리다'는 뜻도 있는데, 여기에서 '온역'(네게프) 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편 이러한 '나가프'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민11:23)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사형 집행과 별도로 또한 역병으로
백성을 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론의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아론이 만든 송아지를 백성들이 다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만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는
실시(행)하다, 제공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 그리고 섬기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그 송아지를 섬겼음이더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15절부터 35절까지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모세의 반응을
보여준다.
모세는 화가 나서 두 돌판을 깨어버렸다. 그리고
두 편으로 나누었다. 여호와의 편과 아닌 편으로 나누게하고『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예수님도 앞으로 복음 때문에 형제가 형제를 미워하는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다. 레위자손은 오늘날 성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사해줄 것을 간청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강하게 하나님께 진언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들을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다. 백성들이 앞으로 하나님을 배반할 날이 오면 보응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시작에 불과 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으로 정탐하도록 했는데, 열명의 정탐꾼은
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말했다. 온 백성들이 그 말을 믿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울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도록 하고 모두 죽게 하셨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들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을 다 광야에서 죽게 하기로 했지만, 모세는 다시 한번 금송아지 사건과 같이 아브라함과 언약한 백성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래서 하나님이 19세 이하의 아이들은 살려주시겠다고 양보하셨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아낙자손 사이에서, 아낙자손을 더
두렵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기적을 보여주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고, 아낙자손은 눈으로 보이는 실체이기 때문에 육의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
하나님이『믿지 못하는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맹세하셨다. 히브리서 3장 16-19절에서『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믿지 아니하므로, 믿음은 곧 순종과 연결된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출애굽 당시, 히브리 백성들이 장자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대문에 양의 피를 칠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중간 과정이 있는 것이다. 어린양은 대속을 위해 죽었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는데, 구원의 결실인 순종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애굽은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나왔지만, 가나안은 순종하지 못하므로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의 대속의 피로 죄가 사해져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종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 순종 안에는『내(혼)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와 함께 죽는『나』라는 존재(혼)는 바로 육의 몸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해바다는 애굽의 병사가 죽은 곳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의 물세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옛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된다. 광야에서는 순종이 요구된다. 그래서 불세례를 받고 혼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옷(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령세례(부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난 새생명들이 가나안에 들어갔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책인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싸워야 하는 문제가 있다.
성령세례를 받는 자는 부활된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부활이 이루어지면, 성도의 심령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심령 속에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같은 것이 남아 있어 이를 제거해야만 한다. 신명기 7장 1-2절에서
처럼 싸워 이기라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지식과
경험,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이다. 이전의 “나” 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일곱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엘로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도가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이 일곱가지의 악한 모습을 부셔야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고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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